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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예술 작품들”

기사입력 2022.01.13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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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은 자신이 속해 있는 세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예술은 그것이 제작된 특정 시대의 철학, 종교 사상, 사회현상을 반영한다. 반면에 예술은 한 시대를 변화시키는 견인차 역할도 한다.  예술은 당대에 살고 있는 사람의 내면을 표현하고 사회와 끊임없이 교감함으로써 세상을 자극하고 인류의 의식을 변화시켜왔다. 원시시대 동굴 벽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추위와 배고픔을 이기기 위해 창의적인 사냥법과 제사의식의 흔적들이 그림을 통해 표현되어 있다. 새로운 건축 양식은 제국을 탄생시켰고, 전쟁과 기아에 고통 받는 사람들은 그림에서 살아갈 용기와 희망을 찾았다. 르네상스 시대 유럽의 건축물들은 카톨릭의 우수성으로 귀결되며, 태국 미얀마 등 동남아의 불교미술은 많은 이들의 경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불편하고 낯선 예술은 인류에게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했다. 미술 또한 그러하다. 수많은 미술 작품들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 묻히기도하고, 때론 논란의 불을 지펴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 빠져 들기도 한다. 사회 의식을 가진 작가의 작품이 세상을 어떻게 바꿨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들로는 어떤것이 있을까?

     

    피카소 ‘게르니카’(Guernica)

    전쟁의 잔인함을 전세계에 알리다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 당시인 1937년 4월 26일, 독일 콘도르 군단이 스페인 제2공화국 세력권이던 게르니카에 가한 폭격을 표현한 작품이다. ‘스페인 내전’은 극우 국민진영과 공화파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었다. 프랑코 장군을 중

    심으로 한 국민진영은 독재를 행하려 하고, 공화파는 이에 대항했다. 이 무렵 유럽 전역에는 파시즘이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었다. 피카소도 이 내전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그 나라의 다른 지식인들처럼 피카소도 공화파에 가담했다. 피카소는 직접 내전에 뛰어들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작품을 팔아서 공화파를 도와주었다. 그리고 내전 중에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큰 돈을 내놓기도 했다. 그렇지만 내전 기간에 피카소가 남긴 가장 큰 업적은, ‘게르니카’ 라는 그림일 것이다.

     

    유럽 전역에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우던 1937년 6월, 프랑스는 세계박람회를 개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총 52개국이 참가하게 될 이 박람회에는 각 나라를 대표할 만한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공화파는 피카소에게 박람회장에 전시할 그림으로 에스파냐의 현실을 알릴 수 있는 작품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피카소는 공화파의 부탁을 받고 그림을 구상하던 중 신문을 통해 참혹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프랑코의 돈을 받은 독일 군인들이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 게르니카라는 작은 마을에 폭탄을 퍼부었다’ 는 것이었다. 이 폭격으로 피레네 산맥에 자리 잡고 있던 평화로운 마을 게르니카는 불과 네 시간 만에 쑥대밭으로 변했다. 하필 이날이 장날이라 많은 주민들이 시장으로 몰려들었기에 인명 피해가 더욱 커져, 목숨을 잃은 사람만도 무려 1660여 명에 달했다.

     

    이 비극적인 소식을 접한 피카소는 피가 끓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소식을 접한 지 약 한 달 만에 7.5미터에 달하는 커다란 작품을 완성한다. 이 그림이 바로 ‘게르니카’ 이다. 때로는 몇 천마디의 말이나 몇 백권의 책보다 단 한 점의 그림이 더 많은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다.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 는 전쟁의 참혹함과 공포를 그 무엇보다도 생생하게 보여 주었기 때문에 세계 곳곳에 전쟁의 잔인함을 알리는데 큰 공헌을 할 수 있었다.

     

    크기는 776.6 X 349.3 cm 이고 현재 스페인 마드리드의 레이나 소피아 국립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로댕 ‘칼레의 시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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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년전쟁(1337~1453)은 프랑스의 왕위 계승 문제가 발단이 되어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영국 왕 에드워드 3세는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 군을 격파한 뒤 여세를 몰아 도버 해협에 면한 도시 칼레로 진격, 식량보급로를 끊고 포위했다. 11개월 동안 완강하게 저항하던 칼레는 식량이 떨어지자 1347년 마침내 항복했다. 항복 사절은 주민들의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칼레 시의 완강한 저항에 분노한 에드워드 3세는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려 했지만 생각을 바꿔 한 가지 요구 조건을 제시했다. 칼레의 지체 높은 시민 6명이 맨발에 속옷만 걸치고 목에 밧줄을 감은 채 성 밖으로 걸어 나와 성문 열쇠를 바치라는 것이다. 6명을 교수형 시키는 대신 주민들의 목숨은 살려주겠다는 것이었다. 시민들은 혼란에 빠졌다.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려는 사람이 없었다. 바로 그때 한 사람이 천천히 일어나 “내가 그 6명 중 하나가 되겠소” 라고 말했다. 칼레 시에서 가장 부자인 외스타슈 드 생피에르였다. 그러자 뒤이어 시장·법률가 등 귀족 계급에 속한 5명이 동참했다.

     

    다음 날 6인의 시민 대표는 시장통에서 에드워드 3세의 진지를 향해 출발했다. 시장통에 모인 사람들은 통곡을 하면서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심한 자책감에 사로잡혀 공황 상태에 빠진 사람들의 눈물로 뿌옇게 흐려진 눈에, 사라져가는 6인의 모습은 영원히 잊지 못할 이미지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영국 왕은 그들의 처형을 명했다. 그러나 임신 중이었던 영국 왕비가 왕에게 장차 태어날 아기를 생각해 그들을 사면해달라고 설득하는데 성공했고, 왕은 6인의 시민을 살려줬다. 

     

    기적 같은 반전(反轉)이었다. 동시대 사람인 프르와사르(1337~1404)는 사건의 전 과정을 연대기에 기록했다. 6인의 용기와 희생정신은 높은 신분에 따른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 의 상징이 되었다.이로부터 수백 년이 흐른 1884년 칼레 시는 이들의 모습을 동상 같은 조각으로 남기고자하였고, 로댕이 이 작업을 하게 된다. 1년여 동안의 작품 구상뒤 나온 1차 모형은 별 이야기가 없었으나 2차 모형을 보고는 말들이 많았다. 영웅이 아닌 인간의 모든 고통을 간직한 그들의 모습, 결연하다 못해 침울한 모습에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하는 모습까지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당당하고 의연한 모습일줄 알았던 사람들은 당황했지만 로댕이 설득하였다고 한다. 이 조각에 받침대를 설치하지 말아달라고 했다고도 한다. 후에 로댕은 “너무 아름답게 표현했다면 사실성을 지키지 못했을 것이고 너무 높은 곳에 설치했다면 영웅성을 찬양하느라 진실을 잊게 하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다

     

    작품은 칼레 시청 앞에 설치됐다. 독일의 대표적인 표현주의 극작가 게오르크 카이저(1878~1945)는 로댕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어 희곡 ‘칼레의 시민’(1914)을 썼다. 

     

    베트남전의 울부짖는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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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2년 6월 8일, AP통신의 사진기자인 베트남 출신 닉 우트(Nick Ut)는 발가벗은 채 울부짖으며 트랑 방 마을 거리를 달리는 9살 난 여자 아이 킴 푹(Kim Phuc)을 카메라에 담았다. 남베트남 군용기 두 대가 자국민이 모여 있던 지역을 네이팜탄으로 오인 폭격한 순간이 아이의 표정에 그대로 드러난 이 사진은 뉴욕타임즈 1면에 실리면서 역사를 바꾼 사진이 됐다. 이 사진이 전세계에 알려지며 반전 여론이 고조됐다.

     

    베트남전이 어떻게 끝났는지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 사진은 사실상 베트남전을 끝낸 사진으로 역사에 남았다. 닉 우트는 이 사진으로 1973년 퓰리처상을 수상했고, 전신화상을 치료하기 위해 17차례나 수술을 받아야 했던 킴 푹은 베트남전의 참상을 고발하는 아이콘으로 남았다.

     

    이강원 busanar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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