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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마을 근대사

- 마을의 유래
- 금성초등학교
- 산성막걸리
- 산성마을 젖소와 고향 돕기 운동

기사입력 2022.07.21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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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금정산 해발 420미터, 전설의 203번 버스를 타고 금정산을 올라가면 나오는 곳으로 흔히 산성마을이라고 부른다. 애초에 금성이라는 지명부터 금정산성에서 유래한 것이다. 지도에서 보면 바로 알 수 있듯이 산 속에 자리하고 있어 묘하게 오지 느낌이 드는 곳이며 해발고도가 420m로 꽤 높은 편이다. 흑염소나 오리같은 요리를 취급하는 음식점이 많으며 맛도 괜찮은 편. 이 곳의 특산물인 금정산성 막걸리도 잘 알려져 있다.

     


    산성마을 출처 금정구청.jpg

    산성마을 / 출처 - 금정구청

     

    마을의 유래

    금성동(金城洞)의 명칭은 금정산성 안의 동네라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금정산성은 사적 제215호인 우리나라 최대의 산성이다. 금정산성은 삼국시대에 축조된 것이라는 흔적은 있으나, 오늘날의 성은 조선시대 축성논의에 따라 축성되었다. 효종 때 동래부사 임의백(任義伯)이 금정산에 성을 쌓을 것을 건의하였고, 현종 8년(1667) 현종이 통제사 이지형(李枝馨)을 불러 왜구를 방어할 책략을 지시하였다. 그 후 숙종 27년(1701) 경상감사 조태동(趙泰東)이 상계(上啓)하자 숙종이 동의하면서 축성되기 시작하였다. 조정의 동의를 얻은 조태동은 동래부사 박태항(朴太恒)에게 공사를 주관하도록 하여 본격적으로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금성동은 죽전(竹田).중리(中里).공해의 3개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죽전마을은 화살을 만드는 대나무가 많이 생산되어 붙여진 이름이고, 중리마을은 중성문이 있었기 때문에 불리어진 이름이다. 공해마을은 공해란 말이 관아를 뜻하며 산성 내의 좌기청, 군기고, 화약고, 내동헌, 별전청 등의 관아가 위치하였던 까닭에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의 형성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신라 때부터 화전민과 승려들이 거주하다가 금정산성이 축조된 뒤에 현재의 마을들이 형성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동래부지(1740)』에는 산성리로 불렸으며, 조선 중기에는 북면(北面)에 속하였고 말기에는 양산군 좌이면(左耳面)에 속하기도 하였고, 한때는 동래군 서면에 속하기도 하였다. 일제때도 부산 부좌이면에서 동래군 좌이면으로, 다시 1918년에는 동래군 구포면 금성리로 행정관할이 옮겨다녔다. 1963년 직할시 승격과 동시에 부산시에 편입되어진 구금성동이라 하였으나, 북부출장소가 설치되자 이의 관할하에 두었으며, 1988년 금정구의 분구로 금정구에 속하게 되었다.

     


    금성초등학교 본관 출처 네이버지식백과.jpg

    금성초등학교 본관 / 출처 - 네이버지식백과

     

     

    금성초등학교

    산성마을 유일한 학교인 금성초등학교는 독립운동가 송학 신필수선생이 주도로 세운것이다. 일제감정기 산성마을에 경찰의 눈을 피해 은둔하던 선생은 1937년 마을사람들과 힘을 합쳐 현 금성초등학교 자리에 금성강습소를 세웠다.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땅이 있는 사람은 기꺼이 자신의땅을 내놓았다 한다.  후에 구포공립보통학교 교장과 의논해 금성강습소를 분교로 만들고 금성강습소 3년을 마치면 구포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입학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한다.

     

    지금의 금성초등학교는 만족도가 매우 높기로 유명한데 한때는 폐교위기까지 겪었지만 혁신을 거듭하면서 위기를 넘겼고, 일부러 자녀를 금성초등학교로 보내기 위해 이사오는 학부모까지 있을 정도라고 한다. 사실상 부산 최초의 혁신학교이자 부산형 다행복 학교의 롤모델로 자주 거론된다.

     

    학교가 초등학교 하나밖에 없어 이 곳의 학생들은 서쪽 북구와 동쪽 금정구의 중학교, 고등학교에 배정받는다. 2018년 12월 기준으로 대한민국에서 두번째로 인구가 적은 행정동이다. 그러나 금정구의 다른 동들과 지리적으로 격리되어 있다는 특성이 있어 다른 행정동과 통폐합되지 않았다.

     

     


    산성막걸리 출처 산성막걸리 홈페이지.jpg

    산성막걸리 홍보간판 / 출처 - 산성막걸리 홈페이지 


     

    산성막걸리

    금성동 , 산성마을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산성막걸리이다. 금정 산성막걸리는 그 유래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조선 초기부터 이곳 화전민이 생계수단으로 누룩을 빚기 시작한데서 비롯되었으며 숙종 32년(1706년) 왜구의 침략에 대비키 위해 금정산성을 축성하면서 외지인들의 유입이 늘어나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때 성을 쌓기 위해 각 지역에서 징발된 인부들은 막걸리 맛에 반해 축성공사가 끝난 후, 고향에 돌아가서도 그 맛을 그리워 했다고 한다.

     

    전통 누룩 특유의 새콤하고 구수한 맛은 일제 강점기에도 그 명성이 이어졌다. 산성마을에서 누룩을 빚는 양에 따라 동래를 비롯해 경남 일대 쌀값이 오르고 내릴 정도였다. 산성에 살던 학생들은 책가방에 누룩을 넣고 다니며 동래에 내다 팔아 학비를 조달하기도 했다고 한다. 산성막걸리가 유명세를 타다 보니 마을 주민들은 애써 만든 누룩을 도둑맞기도 하고 빼앗기기도 했다.

     

    1960년 주세법으로 누룩 제조를 금지한 이후 산성막걸리는 마을 사람끼리만 만들어 마시는 것으로 명맥을 이어 갔다. 5.16 군사쿠데타 전 부산 군수사령관이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산성막걸리를 즐겨 찾았다. 79년 부산에 순시 차 내려온 박 전 대통령은 산성막걸리가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바로 ‘산성막걸리’를 살리기 위해 민속주 1호로 지정하기에 이른다.

     

    마을 사람들은 “박정희 대통령 이후로 우리 마을 누룩을 훔쳐가는 사람도 없고, 가짜를 가져와서 산성막걸리라 하지도 않더라고요. 오로지 우리 마을에서만 민속주 1호가 나옵니다”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산성막걸리는 500년 넘도록 누룩을 발효시키는 전통 제조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우리나라 200여 민속·토속주 가운데 1979년 ‘민속주 1호’로 등록된 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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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귀용어르신 출처 블로그 산성사람들.jpg

     엄귀용 어르신(왼쪽) / 출처 - 산성사람들 네이버 블로그

     

    산성마을 젖소와 고향돕기운동

    해방전 산성 사람들은 죽은 나무나 간벌목을 온천장까지 지게에 지고 가서 팔아 생활했다 한다. 소마차에 나무를 싣고 범일동까지 나무장사를 다닌 사람도 있었다. 흥아타이어 고 정귀옥 회장은 산성마을 출신이다. 일본으로 건너가 독학으로 법을 공부해 와세대 대학에서 수학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흥아타이어에 취직을 하였다. 능력을 인정받아 빠르게 승진했다. 해방후 지인과 함께 흥아타이어를 인수하고 고향사람들이 겪는 가난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고향돕기 운동을 하였다 한다.

     

    처음에는 염소 한 마리씩 나누어 주었더니 키우기도 전에 잡아 먹는 사람이 많았다 한다. 그래서 다음번에는 젖소를 한 마리씩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젖소값의 절반은 지원해주고 반은 우유를 생산해 갚도록 하였다 한다. 젖소가 늘어나면서 산성마을 사람들의 살림살이도 점점 나아졌다. 80년대 들어서 염소고기 음식점이 늘어나고 우유파동을 겪으면서 젖소들은 서서히 사라졌지만 산성 사람들은 아직도 자기 주머니를 털어서 고향을 도왔던 마음을 잊지 못한다고 한다.

     

    산성막걸리 유청길 사장은 고 정귀옥 회장의 마음을 마음에 꼭 담아두고 있다고 전한다. 지금 산성막걸리의 브랜드도 마을의 후대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할 것이라고 전한다.

     

    <자료참고 : 네이버 지식백과 네이버캐스트 - 소읍기행 부산산성마을 / 이야기꾼 블로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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